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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 옥양봉 남쪽 기슭에 있었다. 누가 창건하였는지는 밝히지 않지만, 한때 수덕사보다 규모가 컸다고 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1177년(명종 7) 3월 공주의 천민만기와 망소이(명학 7)가 반란을 일으켜 절인 황리현(현 여주) 진주(현 진천)를 빼앗았다. 또한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이 절의 금탑』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매우 뛰어난 철제 석탑이며, 탑의 절에는 석실이 모셔져 있다."
절터 터는 2대에 걸쳐 왕의 손이 나타나면서 명승지로 알려져 있다. 이를 믿었던 흥선대원군은 1844년(헌종 10)에 사찰을 불태우고 아버지 이구(1788~1836)의 묘를 썼다. 이곳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남연군의 묘로, 1863년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은 고종이었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태운 죄로 가야산 동쪽에 절을 짓고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보덕사라고 이름 붙였다.
옛 절터에는 남연군묘가 있고, 인근에는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182호로 지정된 미륵석불이 있다. 이 미륵불상은 계곡 아래쪽을 향하지 않고 북쪽을 향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설화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절이 불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죽었으며, 원래 절은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는 말들을 물리치기 위해 북쪽을 향해 세워졌다고 한다. 가야사 유물은 당진시 면천면 영탑사에 봉안되어 있으며, 그 중 종에 새겨진 글귀에는 "1760년 2월 가야사 사당에서 종의 흰 뿌리를 녹여 만들었다"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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